양문형 도어와 테이블로 사용 가능한 시트. 자동차의 개념을 이동수단에서 공간으로 바꿔놓은 외형. 전기차가 내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야심작. 예상하셨나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EV9입니다.
실제 모습을 공개한 직후 EV9은 논란의 중심에 서서 다른 측면으로도 주목 받고 있습니다. EV9의 ‘구독 서비스’ 이야기인데요. 현대자동차 그룹이 공개한 EV9의 ‘구독 서비스’는 총 3가지 기능을 제시합니다. ▲직각, 평행 등 자동주차 ▲LED패턴 변경 ▲영상과 음악 감상입니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로서는 최초로 내놓은 구독 서비스에 여론의 반응은 다소 뜨거웠는데요. 여러 쓴소리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이겁니다. “소비자 우롱하냐. 구독 안 하면 못 쓰게 둘 거면 뭐하러 차에 붙여놨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V9의 구독 서비스들은 소비자 부담을 가중하는 소비자 우롱일까요?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봤습니다. 전체 전기차 시장에서 현기차가 내딛는 아주 작은 한 발자국으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좀 더 풀어볼게요.
세계적으로 전기차 제조사들은 ‘전기차의 컴퓨터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올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신년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정의선 회장은 “연구개발을 비롯한 회사 전반의 시스템을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의 성공의 키를 ‘소프트웨어’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되짚은 것입니다. 이미 현대차그룹은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 개편을 지난해 마무리했습니다. 이 조직 개편안으로 한국과 미국에 분산돼있는 소프트웨어 및 인공지능 연구역량이 한 데 모였습니다.
자동차 만들던 회사에서 갑자기 왜 소프트웨어에 집착하게 된 걸까요? 테슬라의 디스플레이를 떠올려보세요. 주행모드, 에어컨 가동 방식, 음악, 에어컨, 기타 등등. 바퀴의 움직임부터 차량 안의 모든 환경까지 디스플레이 하나로 컨트롤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컴퓨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디스플레이를 통해 유저의 지시를 적절하게 이행할 수 있는 전기차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하지요. 테슬라의 ‘컴퓨터’가 바로 그 컨트롤 타워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기존 국내 자동차 제조사들은 수많은 부품사들과 함께 자동차를 만들어 왔습니다. 각 부품사마다 가지고 있는 전장 시스템들은 제각각의 기능을 위해 ‘제각각’ 작동하고 있지요. 이를 하나로 통합하여 총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기존 시스템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현대차그룹이 소프트웨어를 강조하며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전기차를 장악할 컴퓨터 소프트웨어 연구에 힘을 싣고, 전기차 시장에서 앞으로 더 치열해질 ‘컴퓨터 전쟁’을 미리 대비하는 현대차그룹의 움직임입니다.
전기차 시장에서의 컴퓨터 전쟁은 계속 치열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동력원이 ‘기름’에서 ‘전기’로 바뀌는 수준이 아닌, 새로운 모빌리티 IT 제품으로서의 전기차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컴퓨터 탑재가 필수적인 해결 과제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테슬라의 최대 경쟁력 또한 컴퓨터지요. 테슬라 스스로 경쟁상대를 다른 전기차 제조사들이 아닌 ‘애플’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머릿속에서 전기차는 더 이상 전기차가 아니게 될 겁니다. 전기로 움직이는, 바퀴가 4개 달린 기계에 컴퓨터 하나가 부착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컴퓨터에 바퀴가 달려있고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크기가 큰 제품. 이렇게 전기차에 대한 인식과 관점이 전환되는 시점을 그려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형 컴퓨터에 기능을 추가할 때 ‘구독’에 대한 거부감이 들까요? 구독 서비스는 컴퓨터의 기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비용 아닐까요? 전기차가 온전히 컴퓨터로 인식될 수 있다면, ‘구독’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지불할 비용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전기차를 대형 컴퓨터처럼 여기기 부족한 시대라면 그 반대겠지요. 동력원만 전기로 바뀐 전기차에 ‘구독 서비스’를 접목한다면 어딘가 모를 어색함과 불편함이 생길 겁니다. 그 이유는 컴퓨터적인 속성이 부족한 제품(전기차)에 컴퓨터적 속성을 가진 서비스(구독)를 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실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전기차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휴대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큼 자주 있지도 않고, 눈에 띄게 체감할 수준도 아닌 상황이긴 합니다. 전기차를 컴퓨터로 인식할 수 있는 시대는 언제쯤 본격화될까요.
우리 모두는 전기차의 컴퓨터화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절대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EV9의 구독 서비스 논란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대차그룹이 자동 주차 등 신기술에 대한 한 걸음을 내딛었기에 가능했던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현대차 그룹은 자동주차 정도의 기술이라면 ‘구독’ 서비스로 승부를 볼 만한 소프트웨어 기술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앞으로 현대차그룹은 자사 전기차의 ‘구독 서비스’에 대한 유저들의 인식을 바뀔 수 있을까요. 논란이 아닌 논의를 만들어가는 ‘전기차’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EV9의 첫 시동을 응원해봅니다.